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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이야기

(역사 속 수학) 우리나라 수학의 역사

by 프리나01 2022. 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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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은 문화가 형성되는 모든 지역에서 발전합니다. 5천 년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나라에서도 독자적으로 수학이 형성되고 발전해 왔습니다. 중국의 동쪽으로 비교적 안정된 곳에 위치하고 있고, 크고 넓은 것에 대한 필요성이 중국보다 적기 때문에, 정교하고 수준 높은 수학에 대한 필요성이 적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중국의 수준 높은 수학의 영향으로 우리나라 독자적인 수학의 흔적을 찾아보기가 어려웠기도 하고, 특히 일제의 식민지 시대에 민족혼의 말살 정책과 서양 수학으로의 급격한 변화 때문에 우리나라 전통 수학의 역사를 살펴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열, 스물, 서른과 같은 수의 이름이 십, 이십, 삼십처럼 중국의 이름과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져 왔다는 사실에서 살펴보면 우리나라 수학 또한 독자적으로 발전되어 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수학의 발전 과정을 살펴보는 일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나라 수학의 역사

우리나라에서 수학을 가르쳤다는 기록은 신라시대(서기 682)의 삼국사기에 나옵니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고구려와 백제, 신라에서 이미 수학이 발달하였습니다. 이 시대에는 수학이 독자적으로 발전하기보다는 성을 쌓고 일식과 월식을 예언하는 등 다른 학문과 관련하여 발달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당시 성을 쌓는 기술자들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풀었습니다.

 

“일만 입방척의 땅을 파는데, 굳은 흙과 굳지 않은 흙의 부피는 각각 얼마인가? 단, 판 땅과 거기에서 나온 굳은 흙과 굳지 않은 흙의 부피의 비는 4:3:5이다.”

 

비례식을 안다면 여러분도 이 문제를 풀 수 있을 것입니다.

 

고려시대에는 통일신라시대의 제도를 거의 그대로 답습하였으며, 궁정 과학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세종은 수학의 진흥을 위해 큰 노력을 하였습니다. (지난 포스팅에서 세종의 수학 사랑은 이미 언급했었습니다) 세종은 집현전 교리에서 수학을 배우게 했고 자신도 정인지에게서 산학계몽이란 책에 대해 강의받기도 하였습니다. 세종대왕의 이러한 열정으로 인해 당시 수학이 많이 진흥되어왔습니다.

 

이처럼 지도자의 수학에 대한 관심으로 그 나라의 수학 수준을 향상하고 동시에 국가 발전의 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

200012월 중국의 장쩌민 수석이 어느 중학교를 방문하여 수학 문제를 낸 적도 있었죠.

그러나 최근 우리나라에서 수학에 대한 관심이 적어지고 있는 것은 이런 점에서 매우 걱정되는 일입니다.

 

세종 이후 우리나라 수학은 중국 수학사에서의 황금기라고 할 수 있는 송나라, 원나라 시대의 수학을 흡수하여 발전시키면서 독자적인 수학으로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중요한 수학 교과서들이 불타고 약탈당해 수학 분야에서도 대단히 큰 손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경선징묵사집산법’, 최석정구수략’, 홍정하구일집’, 황윤석의 ‘산학입문’, 홍대용의 ‘주해수용’ 등 중요한 수학책들이 저술되었고, 남병철과 남병길 형제, 이상혁 등의 수학자들이 활동하였습니다.

 

경선징 (1616~?)

경선징은 당대 제1로 꼽히던 수학자입니다. 그는 특이하게 곱셈구구를 구구 팔십일부터 거꾸로 시작하고, 이것을 나눗셈 구구에까지 적용하였습니다. 현재 우리가 10분의 1을 할, 100분의 1을 푼이라고 하는데, 당시에는 10분의 1이 분이라고 했는데 경선징은 묵사집산법에서 소수의 이름으로 분, , , , , , , 사로 제시하고 있었습니다.

 

최석정 (1645~1715)

최석정은 명재상인 최명길의 손자인데 당시 대부분의 수학자는 중인 출신이었지만 그는 특이하게 사대부 출신이었습니다. 그가 만든 9차 마방진과 지수귀문도는 지금도 유명한 마방진입니다.

 

홍정하 (1684~?)

홍정하는 전형적인 수학자 집안 출신으로 홍정하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장인은 모두 수학자였습니다. 그는 구일집에서 문자를 사용하여 방정식을 세우는 방법인 천원술에 대해 설명하였습니다. 원래 천원술은 중국에서 시작되었으나 중국에서는 사라지고 조선에서는 더욱 발전된 형태로 남아서 조선 수학의 발달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당시 중국이 우리나라보다 수학이 훨씬 우수하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우리나라 수학은 당시 중국 수학보다 우수한 부분도 있었습니다.

중학교 수학 교과서에서도 종종 나오는 구일집에서는, 1713년에 조선에 와 있던 중국 수학자 하국주를 홍정하가 찾아가서 수학에 관해 이야기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홍정하가 구형의 옥돌에 내접하는 정육면체의 한 변의 길이를 구하는 문제를 하국주에게 물었는데, 이것은 지금 방식대로 하면 3차 방정식 문제가 됩니다. 하국주는 이것은 몹시 어려운 문제다. 당장 풀지는 못하지만, 내일 답을 주겠다”라고” 대답했지만, 그는 끝내 답을 내놓지 못하였다고 하지요.

 

 홍대용 (1731~1783)

홍대용은 양반 집안 출신이었지만 과거시험을 통해 관료로 들어가는 일반적인 전통을 따르기보다는 순수하게 학문을 연구하는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대다수 선비가 과거시험에 매달리던 그때, 망원경을 들고 하늘을 관측하였고, 방에는 천문지도를 책장에는 수학과 기하학책을, 집에는 천문 관측실을 세웠습니다. 정교한 시계 장치를 응용하여 천체의 움직임을 표현한 ‘혼천의(渾天儀)’는 그의 역작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담헌서>의 외집 4~6권<주해 수용>에서는 수학과 천문학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이상혁 (1810~?)

중인 출신인 이상혁은 사대부 출신인 남병길과 공동 연구하면서 서양 수학의 방법을 받아들입니다. 이상혁의 ‘산술관견’이라는 수학책은 일본의 수학자가 조선에서는 그야말로 전대 미답의 경지를 개척하였다고 칭찬할 정도로 탁월한 연구였다고 합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수학 발전 상태

그러나 서양 수학이 들어오면서 동양 수학은 서양 수학과는 다른 형이상학적인 전통에서 출발하였으며 관료조직 속에서 성장하였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특히, 1894년 갑오경장 이후 실시되기 시작한 새로운 학교 교육 체제하에서 전통적인 산술은 영영 그 모습을 감추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전통에만 매달려 잠시 개방을 소홀히 하고 좁은 땅에서 우물 안 개구리처럼 떠들어 대는 동안 많은 분야에서 그리고 수학의 분야에서도 세계에서 뒤처졌습니다. 수학의 노벨상이라고 하는 필즈상을 일본의 경우에는 이미 몇 명의 수학자가 수상하였고 중국의 수학자도 수상한 적이 있는데, 우리나라 수학자는 가장 늦게까지 필즈상을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나라 수학계는 서양 수학을 받아들이고 이를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얼마 전 허준이 교수는 우리나라 최초로 필즈상까지 받았습니다. 우리 민족은 저력이 있고 창의력이 있는 민족입니다. 조만간 우리나라 수학이 세계 수학계에 우뚝 설 날이 올 것이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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