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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이야기

수학자로 알아보는 수학 - 오일러 편

by 프리나01 2022. 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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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세기 최고의 수학자 오일러

 

수학에 영향을 끼친 수많은 수학자가 있지만 탈레스와 피타고라스에 이어 이번 시간엔 오일러를 알아보려고 합니다.

 

300년이 지난 지금도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오일러라는 수학자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오일러는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아르키메데스, 아이작 뉴턴 등과 함께 수학 역사상 최고의 천재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위대한 수학자입니다. 스위스 바젤에서 태어난 그는 러시아 및 독일 등에서 평생 연구에 매진했습니다. 현존하는 수학의 여러 가지 이론의 시초이자 당시에 존재하던 다양한 수학 이론의 발전에 크게 공헌했으며 수학뿐만 아니라 물리학이나 천문학 등에도 많은 기여를 한 사람입니다. 오일러가 만든 기호나 표기법 등은 현대에서도 널리 사용되고 있습니다. 보통 '수학의 왕자'로 가우스를 꼽지만, 천재성으로 따지면 오일러도 전혀 밀리지 않습니다. 오일러는 뛰어난 암산 능력을 갖추고 있었으며 기억력 또한 대단했다고 합니다. 그는 어려운 계산도 암산으로 했는데, 50자리까지도 정확하게 계산해 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특히, 그의 직관성은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런 그를 두고 '아라고'라는 사람은 오일러를 두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오일러는 사람이 숨을 쉬듯이, 독수리가 하늘을 날듯이 남이 보기에는 아무런 고생도 없이 계산한다.”

 

오일러가 연구한 분야는 매우 광범위해서 우리가 배우는 고등학교 수학 과정에서도 그의 업적을 접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오일러 이전에는 지수와 로그가 서로 연관되지 않은 별개의 개념이었지만 그가 지수와 로그의 관계를 정립하였습니다. 그리고 원을 이용해 삼각함수를 정의한 것도 오일러입니다. 그가 만든 오일러 공식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식으로 유명합니다.

 

◆ 오일러의 생애 

그럼 오일러의 생애에 대해 알아봅시다.

 

오일러는 1707년에 스위스의 바젤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오일러의 아버지 역시 수학에 재능이 있었지만, 아들이 목사가 되기를 원하였고, 그래서 오일러는 바젤대학의 신학부에 입학하였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수학에 대한 열정으로 수학을 전공합니다. 그곳에서 오일러는 요한 베르누이라는 수학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베르누이 집안은 소문난 수학자 집안이었습니다. 당시 야곱과 야곱의 동생 요한은 라이프니츠의 제자로서 유명한 수학자였으며, 오일러의 아버지는 야곱의 제자이고, 오일러는 요한의 제자가 되었으니 수학으로 얽힌 두 집안의 관계는 전생까지 이어져 있을까 생각할 정도로 특별한 관계인가 봅니다.

 

베르누이 일가 중 수학의 발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요한의 아들인 다니엘인데, 오일러는 다니엘과 친해지면서 더욱 수학에 전념하게 되었습니다. 오일러는 요한이 짜증 날 정도로 질문을 자주 하였는데, 그러한 요한을 보고 오일러는 하찮은 것 때문에 스승을 괴롭혀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여 가능한 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결심하였다고 합니다. 이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의지와 인내가 수학 실력을 높이는 지름길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수학을 잘하게 되는 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는 바젤대학의 수학 교수가 되기를 원했으나 꿈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20살이 되던 1727년에 그는 러시아의 초청으로 러시아의 아카데미에 가게 되는데, 그가 러시아에 도착하던 날 그를 초청했던 캐서린 1세 여왕은 죽고 맙니다. 또한 피터 2세가 그 뒤를 잇게 되지만 그는 학문을 중시하지 않았고 오일러는 몹시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오일러는 두 번 결혼하여 13명의 자녀를 두기도 하였지만 그중 8명이 오일러보다 먼저 죽었다고 하니 오일러의 일생은 그리 편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28살 때에는 당시의 다른 수학자들이 몇 달 동안이나 끙끙대던 문제를 오일러가 3일 만에 풀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는데요. 이때 너무 눈을 혹사했는지 한쪽 눈을 실명하였고 30여 년 후에는 다른 한쪽 눈도 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도 연구를 놓지 않았습니다. 특히 두 눈이 모두 먼 상태에서도 처음에는 아들에게 불러주고 그 후에는 서기에게 불러주어 대필시키는 방법으로 17년 동안 많은 논문을 썼다고 합니다. 그가 눈이 먼 동안 쓴 책과 논문이 500편 이상이고, 평생 매년 800쪽의 논문을 썼다고 합니다.

40살이 되던 해에는 러시아의 억압적인 정치 상황에 싫증을 느끼고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대왕의 초청으로 베를린 과학 아카데미로 자리를 옮기지만 대왕과의 불화로 베를린 생활은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프리드리히 대왕과의 관계가 더욱 악화하자 59세 때 다시 러시아로 돌아왔습니다. 러시아에서 나머지 한쪽 눈마저 실명되고, 큰 화재로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고, 69세에는 아내가 죽기까지 하는 등 그의 삶은 많은 불행과 불운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수학의 많은 분야에서 연구에 몰두하였습니다. 이러한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종교의 힘이자 위대한 수학자이지만 절대 거만하지 않았던 그의 겸손함이었을 것입니다.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오일러 방정식 등 여러 정리가 있지만 그러한 내용들은 여러분이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쉬우면서도 대중적이고 유명한 오일러의 공식에 대해 조사해보며 수학에 한 발짝 다가가 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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